일단 .... 아침 소식으로 저는 핸드폰에서 Apple의 창시자 이자 퍼스널 컴퓨터의 ..창시자인 스티븐 잡스가 사망하였다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와서 뒤늦게 글을 올려봅니다.

정말....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까웠던일이였고 학생으로서는 정말 ..너무 ..너무 .. 안된 일입니다.


ㅎㅎ 스티븐 잡스의 제품 출시회 이런 것 같습니다..



스티븐 잡스가...희귀 췌장암인 ( 신경 내분비선 종양)에 걸린 후 사진인데요...

정말 아파보이고 힘겨워보입니다.

근데도 ...끝까지 프로젝트를 포기하지않고 ...끝까지 ..끝까찌 몸을 가누며...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 세상과의 이별을 하셨습니다.



정말 마음 고생 힘드시고 아프셨나봅니다.

저렇게 살찐 모습이였는데... 어느세던가...점점... 말라가기 시작하시고는 ..고통과 함게 ....지내오셨죠.

허탈감과... 꽉찬 느낌입니다.

보시다 싶이...정말 대단 하신 분이고.

이분에 업적에 대해 소개를 해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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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

어린시절

1. 탄생 :
스티브 잡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 시스코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사이에서 탄생

2. 입양: 태어난지 1주일 후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주 산타 클라라에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
 
3. 이름의 탄생 : 잡스를 입양한 부부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는 이름을 얻게됨. ( 잡스를 낳으신 부모는 끝내 이혼)

결혼해서 소설가인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을 낳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잡스는 "양부모" 라는 단어를 싫어 하였는데 그래서 자기를 키워주시고 계신 폴/클라라 부부를 자신의 유일한 부모로 여기었다.

4. 잡스 삶의 시작 : 잡스는 학교를 자주 빼먹는 비행청소년이였다.

다행이 담임 선생님이 돈, 사탕 물질로 구슬려 겨우 학교 생활을 하던 도중 히스키트라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음
(순간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는 히스키트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 작동 원리를 익히게 됨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됨

고등학교 시절 팔로 알토의 HP(휴렛 팩커드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으며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게 HP(휴렛 팩커드사)에서 여름 동안 임시 채용 됨

1972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잡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 대학교 등록  -> 철학 공부를 하였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1학기만 수강 후 중퇴하였다.

그 이유는 학비를 내는 부모님이 너무 부담 스러워서 그만 두었다. 하지만 그만 두었어도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며 여러 강좌를 듣고, 특히 캘리그래피(아름다운 손글씨를 그리는 시각디자인의 한 분야. 출판계에서는 표지 디자인에 응용)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매우 많은 도움이 됨.

 

일화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견과류와 물만 섭취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펩시에 계약차 들렀을 때 펩시음료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애플 초기, 펩시콜라의 사장인 존 스컬리를 영입하려 했으나,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남은 인생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한다. 딸인 리사가 태어났을때 부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애플 리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연봉이 1달러인 최고경영자로 유명한데 이는 연봉을 한 푼도 받지 않을 경우에 법적으로 고용관계가 유지될 수 없기에 최소한도로 정해놓은 액수이다. 그는 실제로 연봉 1달러 외에도 스톡옵션이나 여러 가지 성과급 형태로 보상받고 있다.

 

업적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으로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홈브루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최초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탑재하지만, 실패,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밀려 198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사를 세워 세계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986년 이혼 문제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조지 루카스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 하였다. 잡스는 회사이름을 픽사로 바꾸고 10년간 6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픽사는 여러번 단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이후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디즈니사에 합병되었다. 그 후 1997년 넥스트사는 애플사에 인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애플사로 돌아왔다. 그 해 7월 애플사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였으며,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사를 한 해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내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일부 팬들은 예수를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건강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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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ian 언론사 기사

스티브잡스, 선구자인가 독재자인가?
기사입력 2011-10-06 오후 5:25:56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췌장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최근 몇 년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이폰, 아이패드모바일 분야를 혁신하던 애플을 진두지휘했던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객관적인' 부음기사로 명성이 높은 <가디언>은 이날 스티브 잡스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신문은 잡스가 가전 분야의 성공을 넘어 개인용
컴퓨터 시장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재정립한 혁신적 기업가라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가감 없이 다뤘다.

대학 중퇴자이나 비틀스처럼 인도의 구루(guru)를 찾아 떠났던 청년 잡스는 오랜
친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을 창업했다. 최초의 성공과 이후의 쓰라린 실패로 애플에서 축출당했던 잡스는 특유의 혁신정신과 완벽주의로 무장하고 돌아와 애플을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만들었다.

신문은 그가 애플을 파산 직전에서 구해내기 위해 발휘한 수완을 높이 사면서도 그의 독재자적인 경영방식과 몇몇 과오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원문 보기)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잡스는 시장을 창조했다

췌장암으로 오랜 투병 끝에 56세를 일기로 사망한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iPod)과 아이폰(iPhone), 아이패드(iPad) 등으로 전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 10여 년 동안 그는 - 자신이 1976년 세웠던 - 파산 직전의 애플을 [석유 기업] 엑손모빌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시가총액을 지닌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는 모두 상대적으로 최근에 시장에 등장했다. 이 제품들은 비쌌고, 초기 버전에서는 눈에 띄는 특징이 없었다. 그러나 애플 제품은 라이벌 기업들을 눌렀을 뿐더러 음악과 모바일 통신, 개인용 컴퓨터(PC)라는 3개의 산업 분야를 재정립했다. 또한 잡스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와 거기서 만든 <토이스토리>(1995) 등의 영화는 영화 산업을 바꾸는데 일조했다. 산업에 이렇게 많은 충격을 준 기업가는 헨리 포드나 [힐튼 호텔 창립자] 콘래드 힐튼 정도를 빼면 몇 되지 않는다.

잡스는 이러한 비범함으로 애플의 성공을 이끌었다. 그는 주변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사람(control freak)이었고, 완벽주의 때문에 수백 가지의 아이디어를 퇴짜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새 제품을 직접 소개했고, 그가 공들여 작성한 [기조연설문] '스티브노트(Stevenotes)'는 그를 흠모하는 대중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애플 제품을 판매하는 수백 개의 '애플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잡스는 손쉬운 사용과 간소화를 추구하기 위해 업계의 관행을 거부하고 [부품으로 쓰이는] 칩에서부터 애플스토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리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이 미국에서 출시됐을 때 하나의 이동통신업체를 통해 하나의 기본 모델로만 제공됐다. 애플은 또 온라인 앱스토어에 등록되는 애플리케이션(앱)의 인가 권한을 쥐고 이를 통제했다. 수백만 개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쓰이는 어도비(adobe)의 플래시를 아이폰에서 보려면 '탈옥'하는 수밖에 없다. 잡스는 선의의 독재자로 불렸지만, 독재자는 독재자였다.

잡스의 일생에서 초반의 45년은 전자 및 미디어 산업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생 부부의 아이로 태어난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돼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가졌다. 실리콘벨리의 심장부인 마운틴뷰에서 자라났다.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는 팰러앨토 인근의 휴렛 패커드(HP)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고, 그곳에서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과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잡스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있는 리드대학 인문과학대에 진학했다. 한 학기를 다니고 중퇴했지만 [대학에 남아] 몇 개의 수업을 계속 들었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길렀고 때때로 무료 점심을 먹기 위해 [약 11㎞ 떨어진]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걸어가곤 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았던 많은 대학 중퇴자들처럼 잡스의 꿈도 인도에 있는 구루(스승, 거장)을 만나는 것이었다. 친구 댄 코트케와 마침내 인도에 갔을 때, 만나려던 구루는 숨지고 없었다.

이 시절 잡스는 학위도,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능력도 부족했다.(잡스는 나중에 [주변의 현실을 자신의 뜻으로 변하게 하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재 공학도이자 충실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남들보다 적은 칩으로 전기 회로를 만들 수 있었고, 도전을 즐겼다. 잡스는 애플을 창업하면서 그 재능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팀이었다. 잡스의 야망과 끊임없이 재촉하는 성향, 그리고 빠르게 개발시킨 디자인·마케팅 능력이 없었다면 워즈니악은 HP에서 컴퓨터를 만들며 평온한 삶을 보냈을 것이다.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잡스는 시장을 창조했다.

▲ 1984년 4월 24일 애플II의 새로운 모델을 소개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왼쪽)과 존 스컬리 당시 애플 CEO(가운데),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 ⓒAP=연합뉴스

애플에 대한 책 <인피니트 루프>(2000)을 쓴 마이클 말론은 "(잡스는 1976년) 여름이 시작될 때 개인용 컴퓨터에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업계에서 최고의 사업가가 됐다"라고 말했다. 첫 애플 컴퓨터는 조악한 나무 상자에 담긴 컴퓨터광을 위한 기계였다. 이 컴퓨터는 잡스의 부모 집에서 손으로 조립돼 666달러 66센트에 팔렸다. 이는 잡스가 경쟁을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과 경험 있는 최고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계기가 됐다. 전 인텔 직원이었던 마이크 마크쿨라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마이크 스콧을 애플의 첫 CEO로 임명했다.

워즈니악의 차기작 '애플II'는 멋진 디자인과 눈에 띄는 케이스로 제작됐다. '애플II'는 확장 슬롯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어떤 용도에도 적합했다. 내장된 그래픽과 확장성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장점을 가졌고 큰 히트를 쳤다. '애플II'는 1981년 IBM의 PC가 출시되기 전까지 시장을 장악했고 수년 동안 팔려나갔다.

이로 인해 얻은 부와 명성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981년 2월 워즈니악은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몰다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애플의 컴퓨터 개발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 계속됐고, 잡스는 매킨토시를 고안한 제프 라스킨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넘겨받았다. 매킨토시는 워즈니악이 아닌 잡스의 컴퓨터가 됐다.

잡스는 '맥(Mac)'을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에 기반을 둔 첫 일반 대중용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제록스연구소의 앨런 케이 등의 컴퓨터 공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그들은 고가의 제록스 스타 워크스테이션에서 이러한 기능을 구현했고, 나중에 애플이 9995달러에 내놓은 '리사'에서도 쓰였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잡스는 맥이 컴퓨터광이나 과학자, 사업가보다는 일반적인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기가 되길 바랐다. 이는 매력적인 외관을 갖췄지만 소비자들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앨런 케이는 자신이 남긴 메모에서 맥을 두고 "1쿼트[약 0.94리터]짜리 연료통을 단 혼다자동차"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맥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TV 광고 중 하나를 통해 선보였다. '1984'라고 이름 붙여진 이 광고는 [프로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 프로그램에서 한 번 방영됐지만 미국의 주요 잡지에는 20페이지 분량의 광고가 실렸다.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빌 게이츠는 출시 행사에서 잡스와 함께 등장해 맥을 칭찬하면서 MS의 소프트웨어가 구동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MS워드와 엑셀, 파워포인트가 맥용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맥은 실패했다.



1985년 애플은 6개의 공장 중 절반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5분의 1인 1200명을 해고했다. 그리고 1분기에 손실을 봤다고 밝혔다. 잡스는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건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겠나?"라고 직접 설득해 펩시에서 영입한 존 스컬리 CEO와 갈등을 빚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맥은 이전의 방식으로 다시 디자인됐고 매킨토시II가 1987년 출시됐다. 매킨토시II는 특히 디자인과 출판 업계에서 성공적이었다. 당시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잡스는 "누군가 내 복부에 주먹을 날려 숨통을 막은 기분이다. 난 불과 30살이고 제품을 만들 기회를 원한다. 내 안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훌륭한 컴퓨터[프로젝트]가 있다. 애플은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새로운 회사 넥스트(NeXT)를 세웠고 기업과 고등교육 [프로그램] 이용자들을 위한 유닉스(UNIX) 기반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했다. 그는 몇몇 애플 직원을 데려왔고 이 중에는 맥 프로젝트에 참가한 몇몇 뛰어난 인재들도 있었다. 넥스트가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이들이 만든 '넥스트 큐브'로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WWW)'을 개발했지만[첫 인터넷 브라우저와 웹 서버 개발을 말함] 판매량은 실망스러웠다. 넥스트는 하드웨어 분야를 포기하고 운영체제 판매로 전환했지만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잡스는 변했다. 그가 영국에서 넥스트 제품을 출시할 때 그는 멋지게 차려입은 예의바른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MS가 마침내 마우스와 GUI를 이용한 윈도 95를 출시한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애플의 연간 총매출은 1994년 110억 달러에서 1998년 59억 달러로 추락했다. 회사는 적자를 봤고 몇몇의 매각 시도가 있었다. 애플 이사회는 회생을 위해 길 아멜리오를 영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잡스는 나중에 "제품들이 형편없었어! 그것들은 더 이상 매력이 없었다고!"라고 말했다.

맥 컴퓨터를 위한 운영체제 개발은 중단됐고 아멜리오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사들여야 했다. 잡스 대신 매킨토시 개발 책임자가 됐던 장 루이 가시에의 BeOS를 쓰려고 했지만 1996년 말 넥스트를 사들였다. '슈퍼 세일즈맨' 잡스는 또 한 번 해냈다. 애플은 가시에가 제시한 2억7500억 달러는 너무 비싸다고 한 후에, 넥스트를 4억2900달러에 인수했다.

잡스는 아멜리오의 자문역으로 애플로 컴백했다. 그러나 공식 직함이 무엇이건 누가 쇼의 주인공인지는 분명했다. 잡스는 이사회의 쿠데타를 모의했고, 1997년 9월 '임시 CEO'가 됐다.

애플 제품에 대한 추종은 흡사 종교적인 성격을 띠어왔고,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것은 '맥 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도 같았다. 입양된 소년이 창고에서 회사를 설립해 부와 명성을 얻고, 그 회사에서 쫓겨난 뒤 다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잡스의 스토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었다.

애플이 경영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잡스에게도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잘 팔리지 않던 제품을 청산했고, 제품군을 극도로 단순화했고, 매력적인 디자인의 제품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십여 가지가 넘는 맥 모델을 아이맥(iMac)으로 단순화했고, 넥스트가 개발한 운영체제 넥스트스텝을 새로운 운영체제인 'OS X'로 개조했다.

잡스는 [1997년]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그램을 맥에서 계속 쓸 수 있게 하는 약속을 얻어 냈다. 당시 빌 게이츠는 보스턴에서 있었던 애플의 기자회견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게이츠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들은 1984년 애플 광고에 등장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잡스는 오리지널 매킨토시 때 썼던 방식을 고집했다. 대대적인 발표회와 엄청난 TV 광고를 쏟아내기 전까지 본인의 철저한 감시 하에 비밀리에 제품을 개발했다. 그는 또한 컴퓨터 성능을 높이기 위해 만드는 확장 슬롯을 없애고 배터리까지 내장시키는 등 최대한 가전제품과 유사한 제품을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러나 1984년 이후 세상은 변해있었고,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취미생활용이나 업무용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제 컴퓨터를, 나아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애플이 맥을 구했더라도 윈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별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잡스는 넥스트가 애플에 팔리기 전에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만약 애플을 경영했더라도 매킨토시는 가능한 최대한 이용한 후에 그 다음 훌륭한 것을 만드는데 몰두했을 것이다. PC 전쟁은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래 전에 승리했다."

잡스는 자신의 말대로 다른 길로 갔다. 2001년 10월 아이팟(iPod)을 선보였고 2003년 4월에는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내놨다. 그로 인해 애플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잡스는 2007년 1월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애플이란 이름의 컴퓨터는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2001년 80억 달러였던 연매출은 2010년 650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

대부분의 컴퓨터 기업들이 IBM과 싸우고 있었지만 잡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기업 소니와 경쟁하길 원했다. 애플은 사용자들에게 IBM과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라고 요구했다. 잡스는 분명 그렇게 한 사람이다.

잡스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지는 못했다. 독재자 같은 운영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애플의 하드웨어 부문 지도자인 존 루빈스타인은 잡지 <와이어드>에 "우리는 테러리스트 조직처럼 세포로 움직인다"고 말했고, 애플의 수석 에반젤리스트였던 가이 가와사키는 "스티브는 '나쁜 놈'(asshole)도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잡스가 베스트프렌드인 워즈니악이 받아야 할 보너스를 가로챈 것에 대해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잡스는 딸 리사를 한동안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 지역의 사적지였던 저택을 샀는데 팰러앨토로 이사하면서 그 집을 방치했다. 그 때문에 지역의 유적보호주의자들은 잡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그 집은 2011년 2월 무너져버렸다.

유족으로는 1991년 불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로렌 파웰과 세 자녀, 전처 사이에서 난 딸 리사, 여동생인 소설가 모나 심슨이 있다.

▲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애플스토어 유리창에 한 팬이 "고마워요, 스티브"라는 글귀를 남겼다. ⓒAP=연합뉴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김봉규 기자,황준호 기자(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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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잠들다] "직관 따라 나아가라"… 죽음 앞에서도 혁신 이끈 'IT 선지자'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입력시간 : 2011.10.06 18:00:58 수정시간 : 2011.10.06 18:00:58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

지금도 시대의 명연설로 꼽히는 이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는 "남의 인생을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강조했다. 이어 "언제나 더 나은 것을 희망하며 앞만 보고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인생이 바로 그랬다. 언제나 돌진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다 보면 운명이 언뜻 관계없어 보이는 '점(dot)'들을 이어 하나의 일관된 선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두 번의 좌절을 겪었지만 애플뿐만 아니라 정보기술(IT) 업계의 '선지자(Visionary)'로서 세 번의 전세계적인 혁명을 이끌어내고 이 땅을 떠났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라="여러분의 심장과 직관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이 돼야 하는지, 심장과 직관은 알고 있습니다. "(스탠퍼드 연설)

그의 인생이 그랬다. 직관에 따랐다.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입학한 리드대를 6개월 만에 걸어나왔다. 배울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잡스는 숙소도 생활비도 없어 빈 콜라병을 주워 팔고 주말마다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인도 사원의 무료 급식을 위해 걷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 정말 행복했고 귀중한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 때 들은 서체(calligraphy) 강의다. 서체 수업은 잡스에게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고 이 기억은 십년 후 잡스가 첫 매킨토시를 만들던 때 되살아났다. 잡스는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서체 강의를 청강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매킨토시나 그 이후의 컴퓨터들이 다양한 서체를 포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은 잡스=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창업했다. 둘은 차고에서 첫 작품인 애플Ⅰ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후 애플Ⅱㆍ리사ㆍ파워북ㆍ매킨토시 등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당시 거대기업이었던 IBM과 함께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만들어나갔다. 잡스는 단순한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라 '보는 눈'을 갖춘 선지자이기도 했다. 1979년 실리콘밸리제록스 부설연구소를 방문했던 잡스가 그래픽사용자환경(GUI)의 진가를 알아보고 1983년작 '리사'에 적용한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GUI는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하는 등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인터페이스로 당시의 컴퓨터는 오로지 텍스트로만 이뤄져 있었다. 잡스는 제록스 연구소에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GUI를 보고 가능성을 내다봤고 1990년대 중반까지 텍스트 위주의 '도스(Dos)' 운영체제를 고수했던 마이크로소프트(MS)'도 결국 윈도를 내놓으면서 GUI를 채택했다.

잡스는 또 당장의 수요를 좇기보다 먼저 수요를 예측하고 때로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다. 2001년 잡스가 아이팟을 들고나왔을 때 여전히 '워크맨'의 신화를 믿고 있었던 소니는 "제조 능력이 없는 애플은 1~2년 내 쫓겨날 것"이라며 애플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잡스는 누가 뭐래도 굴하지 않고 '아이(i)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생태계는 지금 아이팟과 아이폰ㆍ아이패드로 끈끈히 연결된 채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두 차례의 좌절, 잡스를 거인으로=두 차례의 좌절은 건방진 천재를 성숙시켰다. 잡스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잡스는 애플의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모든 일에 관여했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면박을 줬다. 1985년 잡스 자신이 펩시콜라에서 스카웃해 온 존 스컬리 당시 애플 CEO로부터 해고당했을 때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실패는 잡스에게 약이 됐다. '구글드(Googled)'의 저자인 켄 올레타 뉴요커 수석 칼럼니스트도 "잡스는 실패를 경험한 덕에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 래리 페이지를 압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두 번째 좌절은 더욱 무서웠다. 아이팟으로 애플의 제2 전성기를 빚어낸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 잡스는 "언제든 죽음과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기로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년 후 죽음을 이기고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스마트 혁명을 주도했다. 1980년대의 개인용 컴퓨터 혁명과 2000년대 초반의 아이팟 혁명에 이어 세 번이나 전세계적인 혁명을 이끌어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2009년 6월 간 이식수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씩이나 등락하는 등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애플이 너무 스티브 잡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주요발언
2010년 6월 3일 스티브잡스는 데스크톱 PC를 '한물간 농장트럭`에 비유하면서 "윈도 컴퓨터가 끝없는 내리막을 걷고 있다"며 데스크톱 PC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관련서적
《스티브 잡스의 명언 50》, 하야시 노부유키 저, 스펙트럼북스, 2010, ISBN 978-89-93497-28-1
《스티브 잡스의 수퍼업무력》, 다케우치 가즈마사 저, 스펙트럼북스, 2009, ISBN 978-89-93497-22-9

최장암이란?

그를 데려간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독한 암으로 불리는 무서운 암이다.
췌장암은 국내에서 아홉 번째로 많이 생기며 5년 생존율은 7.6%에 불과하다.

치료해도 2년 안에 재발하는 비율이 80% 이상일 만큼 예후가 좋지 않다.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나중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어떤 암보다도 조기진단이 중요하다.

그러나 암이 상당히 커질 때까지 별다른 증상이 없고, 특히 췌장은 위 뒤에 숨어서 몸통

깊숙이 위치하기 때문에 엑스레이나 복부초음파 검사 등으로 암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췌장은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중요한 장기다. 췌장암이란 췌장에 생긴 암세포로

이뤄진 종괴(종양덩어리)를 말한다. 췌관세포에서 발생한 췌관 선암종이 90% 정도를 차지,

일반적으로 췌장암으로 불린다. 그 외에 낭종성암(낭선암), 내분비종양 등이 있다.

췌장암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진게 없고 암 전 단계의 병변 역시 뚜렷하지 않다.


 


췌장암이 발생하기 쉬운 요인에는 ▷45세 이상 연령 ▷흡연 경력

▷두경부나 폐 및 방광암의 과거력 ▷오래된 당뇨병 ▷지방이 많은 음식 섭취 등이 있다.

환자의 5~10%에서 유전 소인도 나타난다.

췌장암의 증상은 비특이적이다. 복통, 식욕부진, 체중감소, 황달 등이 가장 흔하다.

췌두부암 환자의 대부분에서 황달이 발생한다. 대변과 배변습관의 변화와

구토,오심, 쇠약감, 식욕부진 등도 잦게 나타난다.

90% 이상의 환자들이 복부 통증을 느끼지만 그냥 지나치기 쉽다.

췌장암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는 완전한 외과적인 절제지만 이에

해당하는 환자는 20~25% 정도에 불과하다. 외과적인 절제가 불가능한 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약 6개월로 알려져있다.

2003년 10월 췌장암 판정을 받은 잡스는 2004년 8월 성공적인 외과수술로 종양을

절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됐고 2009년 6월에는 간 이식까지 받았다.

한국인도 유독 췌장암의 생존율이 낮아지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주요 암의 5년 상대생존율 추이' 자료에 따르면 암 관련 통계를

시작한 1993년의 주요 암 5년 생존율은 41.2%에서 2008년에 59.5%로 증가한 반면

췌장암은 같은 기간 9.4%에서 7.6%로 감소했다.

췌장암은?

췌장은 음식물의 소화를 위한 소화효소와 인슐린과 같은 호르몬을 분비하는 장기로, 위장의 뒤에 위치하며 약 20cm의 기다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췌장은 크게 두부(머리부분), 췌부(몸통부분), 미부(꼬리부분)로 나뉜다.

이와 같은 췌장에 발생한 암을 췌장암이라고 하는데, 췌장의 두부에 흔히 발생한다.

췌장암의 원인

췌장암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흡연, 만성췌장염, 가족 중에 췌장암 환자가 있는 경우, 고지방 고칼로리 식이 등이다.

췌장암의 증상

다른 대부분의 암과 마찬가지로 췌장암도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다. 암이 진행하여 일정 크기 이상이 되거나 주변으로 퍼져나가면서 증상을 일으킨다. 흔히 나타나는 증상은 입맛이 없어지고, 체중 감소 등의 일반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황달이 발생하면서 암이 더욱 진행하여 주변의 혈관으로 복막으로 퍼지면 출혈, 복수 등이 나타나거나 배에서 암덩어리가 만져질 수도 있다.

췌장암의 치료법

췌장암의 치료에는 수술과 항암약물요법, 방사선요법 등의 암 자체에 대한 치료와 막힌 담관을 배액하거나 통증을 줄여주는 치료가 있다.

췌장암의 예방법

  • -금연: 흡연은 췌장암과 폐암, 구강암, 식도암, 후두암, 방광암 등의 원인이 된다.
  • -규칙적이고 균형잡힌 식사: 고지방식이나 고칼로리식이는 췌장암 원인뿐만 아니라 여러생활 습관병의 원인이 된다.
  • -가족력: 가족 중에 췌장암 환자가 있거나 배가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을 때에는 진료를 받아야한다. 췌장암도 조기진단만 되면 완치가 가능하다.

 


삼성, 호주 법정서 애플에 협상안 제시

오원석 기자 2011. 10. 02

삼성전자와 애플이 벌이고 있는 법정 다툼에 변화의 기류가 보인다. 무대는 호주다. 현지시각으로 10월1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호주에서 ‘갤럭시탭10.1′을 출시하기 위해 애플에 협상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캐턴스 삼성전자 변호사는 호주 시드니연방법원에서 열린 갤럭시탭10.1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과 관련한 3차 심리에서 애플에 협상 의사를 전달했다. 삼성전자가 애플에 전달한 협상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플이 삼성전자 갤럭시탭10.1에 문제 삼은 터치스크린 기술과 관련한 특허인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삼성전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호주에서 갤럭시탭10.1을 출시할 수도 있다. 스티븐 벌리 애플 변호사는 “삼성전자의 제안에 잠재적인 합의 가능성을 봤다”라며 “삼성은 불편함을 덜 것이고, 애플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애플의 결정이 주목된다.

삼성전자는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쇼핑 시즌을 놓치지 않고 갤럭시탭10.1을 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데이비드 캐턴스 삼성전자 변호사는 “애플이 제안을 받아들여 합의가 이루어지면, 다음 주 중 갤럭시탭10.1을 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성전자와 애플 두 업체는 호주 시드니연방법원에서 열린 3차 심리에서도 결판을 내지 못했다. 애플은 갤럭시탭10.1이 애플 제품과 흡사하다고 주장했고, 삼성전자는 갤럭시탭10.1에 이용한 기술은 범용적인 기술이라고 반박했다.

갤럭시탭10.1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최종 심리는 오는 10월4일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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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애플과 삼성이 전면 고소전을 붙던 중 호주 법정에서 협상안을 내어놓은 것 같습니다.

계속 이대로 싸운다면 분명 둘중 한곳은 큰일날지도 모릅니다.

요즘 삼성이 MS , GOOGLE 과 손을 잡으면서 전면적인 애플 공격에 몰입중인데요.

이와중에서 정말 어떻게보면 일부로 누군가를 망하게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 제품이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거일수도 있습니다.

흠 이대로 간다면 ... 어느 한곳은 볼 수 없는 존재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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